혐오의 역사
혐오의 역사 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마치 과학자가 대자연을 탐구하는 것처럼, 나를 관찰하고 분석한다. 이것은 습관이고 취미이면서 오락이다. 그 역사는 이렇다.

고등학교 때 나는 문학 동아리의 회장을 했다. 내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성실하고 무난한 성격 때문이었다. 출중한 친구들은 따로 있었고, 그 중에도 부회장이 두각을 나타냈다. 성실하지만 좀 모자란 회장과 잘 놀면서도 능력 좋은 부회장은 출발이 좋지 않았다. 부회장은 사사건건 회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회장은 곧 의기소침해졌지만, 자존심을 꺽지는 않았다. 그것마저 없으면 증발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감 없는 자존심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그것이 리더라면 더 큰 일이다. 우리는 매 순간 치명적으로 다퉜고, 나는 곧잘 억지를 부렸다. 열등감이 나를 강점했다.

그때 교생이 실습을 나왔다. 학교 선배였던 그는 동아리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학창시절, 동아리 밖에서 창작을 하던 그는 아웃사이더였다. 동아리의 선배들은 졸업 후에 문학을 청산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에게 선물을 받았다. 두 권의 시집이었다. 하나는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였고, 다른 하나는 기형도의 '잎 속의 검은 잎'이었다. 그는 기형도를 선악과에 비유하면서 주의해서 읽을 것을 당부했다. 나는 류시화 대신에 기형도를 잡았다. 염세가 흘러들어왔고, 그렇게 나의 중세(中世)가 열렸다.

열등감과 염세는 단단한 자기혐오를 낳았다. 나는 나를 정말 심하게 증오했다. 그 씨가 마르고,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는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동시에  나는 나를 발견했다. 고통은 '나'가 여기 있다고 고래 고래 고함을 지르며 팔짝 팔짝 뛰었다. '나'는  빼도 박도 못하고 나에게 발각되었다. 나는 그 '나'를 자의식이라고 명명했다. 그 때부터 나는 나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혐오다. (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위대한 천재들이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요절한 것이나, 오래 산 천재 중에 불행한 소수자가 많았던 것은 고통과 자의식의 상관관계를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모든 천재성의 원천은 정직성이다'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보편성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남을 분석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나를 통해서 남을 보는 것이다. 보편성의 열쇠는 자기 자신이다. 나의 장점은 출중한 능력이 아니라, 나에 대한 나의 냉담한 시선이다.




      + 죽은 시인의 사회
      + 기형도


2009/04/15 23:46

RSS | 한RSS | 구글리더
트랙백 :: http://egoing.net/trackback/1105
미구엘 2009/04/16 10:12 L R X
너무 아름답고 진실한 글이군요. 살짝 감동했습니다. ^^
egoing 2009/04/16 20:20 L X
이 글을 쓰고 다음 날 아침에 보고 낮 뜨거웠는데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Gloridea 2009/04/16 13:44 L R X
매우 공감합니다. 저는 종교적 측면의 갈등 끝에서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egoing 2009/04/16 20:32 L X
그 체험을 저도 들어보고 싶내요. 저 역시 종교적인 갈등이 있었거든요.
쉐아르 2009/04/17 01:11 L R X
가끔은 저를 외면합니다. 정면으로 바라보기엔 너무 부끄러워서요 ㅡ.ㅡ
egoing 2009/04/17 06:59 L X
그런데 부끄럽다는 그 느낌 자체가 어쩌면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끄러움 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 저는 두렵습니다. 요즘 점점 부끄러움이 줄고 있습니다.
j준 2009/04/17 12:23 L R X
전 류시화를 잡았습니다.

날라리라능;; OTL
egoing 2009/04/17 16:58 L X
류시화를 잡는 것과 날라리는 관계가 없습니다 ^^
J준 2009/04/17 22:41 L X
허걱! 상관이 없었나요? 그나마 핑계꺼리가 있었는데...

는 농담입니다. 류시화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전 말랑말랑한 것이 좋더군요.

그래도 세상을 발전시킨건 컴플렉스라고 생각합니다.
wldus 2009/04/27 04:07 L R X
'혐오'는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가장 혹독한 훈련 방식 중의 하나이겠지요. 어쩌면 자기 객관화의 유일한 '입문방식'일수도 있겠구요. 사람마다 그 동기는 다를 수 있지만 객관화의 첫걸음은 자기부정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부정은 혐오의 감정을 동반하기 쉽겠지요.
스스로에 대한 객관화는 괴롭지만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물론이고 사건이나 현상을 바로보는 눈, egoing님이 말씀하신 '정직성',을 위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걷어내는 능력. 알맹이에 다가가기 위해 알맹이를 둘러싸고 있는 불필요한 껍질을 까낼 수 있는 능력은 스스로를 바로보는 혹독한 훈련을 한 자들이 다다를 수 있는 성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들을 이해하고 '정직하게' 분석해내는 힘을 길러두면,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바라볼때도 비슷한 방식을 작동시키기가 수월하지 않을까..방법론적으로..뭐 이런 생각들..

그런데... '자뻑'도 아니고 '자학'도 아닌 적절한 수준의 자기객관화라는 것은 상당한 연륜과 내공이 필요한 이른바 '성인'의 경지가 아닐까 생각해요. 결국 그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자뻑과 자학 간을 요동치며 살아내고 있는건 아닐까..그렇지만, 그런 상태에 도달한다는건 과연 괜찮은걸까...-.-;
윽, 너무 길어졌군요. 내일 아침에 보면 지워버리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달겠습니다 ^^
egoing 2009/04/27 08:57 L X
인간은 기본적으로 나르시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혐오는 상당히 요긴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나르시즘과 혐오를 통해서 자기를 반추하는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자신을 객관화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성인이겠내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나그네 2009/05/14 12:41 L R X
나에 대한 냉담한 시선이라?
그것을 착각이겟죠. 혹은 자기 미화의 비뚜러진 표현?
제일 피곤한 여자는 따지는 여자죠.
그래서 나는 공부하는 여자와 결혼 안 했어요.
나란 것은 없다네요, 나란 것은 습관이래요. 내가 없으면 뭐가 있겠어요? 자연은 언제나 있죠. 나는 그 자연을 밟고, 내 마음대로 이용하며 살죠. 그러니 자연이 제일 잘낫죠. 그렇게 짓밟히고도 제일 오래 살며 모든 것이 그 덕에 사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나도 모르겠네. ㅋㅋ
egoing 2009/05/14 14:55 L X
그래서 제가 이런 글을 썼지요. http://egoing.net/1108 부인을 자연에 비유하셨군요.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자연의 지배를 받고 있지요. 저도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내요 ^^
CTL 2009/08/14 11:01 L R X
니체를 읽어 볼 것을 권해드립니다. 니체의 말 하나로 추천을 대신합니다. "
즐거운 학문 335-관찰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것을 아는 소수의 사람들 중에ㅡ자기 자신을 관찰할 줄 아는 사람은 또 몇 명이나 될까! "모든 인간에게 가장 먼 존재는 자기 자신이다"

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
11[10]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자 하는 열망ㅡ 이것만이 훌륭한 태도이다 : 다른 것을 바라보거나 다른 눈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ㅡ그건 단지 자리만 바꾼 것일 뿐 여전히 이기주의적인 시각일 것이다!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심각하고 근본적인 착란으로부터 우리는 치유되고자 한다 : 자기애라고 하면 너무 좁고 잘못된 표현이다 ; 자기혐오를 비롯한 모든 감정이 끊임 없이 짧은 이 순간적 변화와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CTL 2009/08/14 11:05 L R X
만일 니체를 읽게 되신다면 <아침놀> 부터 시작하심이 좋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연에 대한 체험이 동반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듭니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부처,노자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을 보는 태도는 너무나 소중한 태도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혹시 길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두서 없이 적었습니다.
egoing 2009/08/15 10:08 L X
두서 없지 않았구요. 조언감사합니다. 언젠가 마주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ㅇ_ㅇ 2009/11/13 21:28 L R X
자기를 낮추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잘못된 짓을 하는 게 분명해 보이는데도 아니라고 내가 잘났다고 박박 우기는 인간들을 보면 에고잉님같은 분이 절실합니다.
egoing 2009/11/14 01:20 L X
자도 그런 인간들 중 하나예요 ㅠㅠ

아이디 :
비밀번호 :
홈페이지 :
  비밀글로 등록
내용 :
 


[PREV] [1] ... [177][178][179][180][181][182][183][184][185] ... [522] [NEXT]
RSS | 방명록 | 트위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