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과학과 문학
|
과학과 문학 과학은 인간의 신체를 확장한다. 동시에 인간을 가상의 세계로 강제 이주시키고 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문학을 업으로 하는 예술가들이 대체로 인문학이라는 카테고리에 고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언어학이나, 사회학에 대해서는 출중하지만,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이자, 종교이고, 이데올로기인 과학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언어가 생각을 지배하듯이, 과학은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1995년 작인 공각기동대를 권한다. 엔지니어가 보아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박식과 13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예지가 인문학도의 손끝에서 펼쳐진다. 과학은 인간을 시스템의 부분으로 트랜지스터화한다. 나노 단위로 트랜지스터화된 인간성은 삶에 대한 총체적인 시각의 수립을 방해한다. 과학이 만들어낸 시스템이야 말로 문학이 치열하게 리버스엔지니어링 해야 할 현실이 아닐까? 인문학의 위기는 한계를 자인하는 인문학이라는 말 자체에서 온다. * 리버스엔지니어링 : 제품의 원리를 거꾸로 추적해서 그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방법. + 과학과 인간 + 과학과 종교 2008/09/07 08:07 |
|
|
|
|
|
트랙백 :: http://egoing.net/trackback/778
|
Tracked from 미구엘의 마음여행 2008/09/11 10:09 x
제목 : 일렉트로니카 - 인문주의와 디지탈을 생각하다.
어쩌면 종교적인 세상의 인간이 훨씬 행복하다. 아는 것이 병이란 말이 있듯이, 믿는 마음에 어떤 전제조건을 달지 않고 믿음 그 자체로 평온을 추구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와? |
|
|
|
|
|
공각기동대 - 과학과 종교
|
공각기동대 - 과학과 종교 관련글 : 공각기동대 난민과 반도
egoing이 전번 글에서 매우 흥분했었지만, 가장 좋아하는 에니메이션을 묻는다면 여전히 '공각기동대'이다. 공각기동대는 역사의식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댕강 폄화화하기에는 말도 많고, 생각도 많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작품으로써 평가받아야 할 이유도 있는 것이니까. 반도와 난민에 대한 격정은 전번 글로 갈음하는 것이 좋겠다.
'자신이 자신인 것은 기억 때문이다.' 오리지널 공각기동대에서 비스듬히 벽에 기댄 소령이 한 말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 대한 기억의 결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에게서 잊혀진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소우주에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가 관계하고 있던 세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숱한 영화들이 기억상실증이라는 소재를 통해 이러한 종류의 죽음을 재탕하고 있다. 우연한 사건으로 기억을 상실한 주인공, 주인공의 기억 찾기 위한 온갖 노력. 이것은 육체적인 죽음과 그 죽음 극복하려는 우리의 태도와 너무나 닮아있지 않은가? 기억을 되찾는 것은 곧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근 미래의 부르주아 인간들은 자신을 전뇌화한다. 전뇌화는 네트에 인간의 정신을 연결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데이터화 될 수 있고, 복제될 수 있으며, 저장될 수 있게 된다. 기억을 하드디스크에 저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 인간은 네트를 통해 육체를 옮겨다니며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해보자. 나를 똑같이 카피한 내가 옆에 서 있다. 그럼 그것이 나일까? 타인에게 그 것은 나일지도 모른다. 타인과 타인의 관계에서 그 시작은 육체이고, 그 실체는 기억이니까. 육체와 기억을 모두 가진 카피가 존재한다면 타인에게 그 것은 나의 부활이거나, 또 다른 나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입장에서도 카피본이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바로 이 미스테리한 지점에서 고스트(Ghost)가 드러난다. 나의 시선과 그 시선이 연결된 자아는 육체를 빠져나가지 않는다. 고로 하드디스크로 엑스카피 할 수도 없다. 공각기동대의 세계에서 인간은 타인에 대해서는 부활할 수 있는 존재이다. 육체는 안드로이드로 세우고, 정신은 백업 된 기억으로 리커버리하면 되니까. 하지만 진정한 부활, 즉 고스트까지 복구된 부활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물론 이 영화는 반쪽 부활에 만족하지 못한다. 계속되는 시리즈를 통해 고스트의 실체를 탐구한다. 고스트에 대한 탐구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며, 영원히 살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이것은 고대에서부터 계속된 영적인 탐구와 다름 아니다. 이 영화는 종교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신흥종교의 이름은 '과학'이다.
오늘날에도 전통종교는 영적인 활동의 주체이다. 문제는 전통종교가 신흥종교인 과학에 비해 영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역활이 바뀐 것 같기도 하다. 대형교회와 사찰들은 기업화가 되어가고 있고, 과학자들은 종교적 카리스마로 영생을 약속한다.
생명공학은 줄기세포를, 기계공학은 로봇을 앞세워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무서운 속도로 전진하고 있다. 영원히 살고자 하는 소망과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등에 업고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곧 공각기동대의 상상력에 도달할 기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랑 없는 믿음과 소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핵전쟁과 난민, 빅브라더의 감시, 해킹에 대한 불안. 과학은 과학이어야 한다. 과학이라는 이름의 종교야 말로 양의 탈을 쓴 거짓 선교사이며, 이단이다.
그러나 정작 사랑을 실천해야 할 종교는 어디에 있는가? 손쉽게 회개하고, 손쉽게 용서 받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다시 죄를 저지른다. 이 용서와 회개의 상습적 반복으로 죄의식은 점점 희미해진다. 이번 주 일요일에 다시 회개하면 되니까.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 참으로 뛰어난 유저빌리티(usability) 아닌가? 헌금과 출석률이라는 성과지표로 구원을 소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른 목소리를 사탄과 이단이라는 고약한 주홍글씨로 몰아세우는 오늘의 종교에서 사랑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 걸까? 같은 교인들간의 친절함으로 폄하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권위주의, 관료주의, 편의주의, 성장제일주의라는 우상을 섬기는 다신교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 2007/07/09 02:01 |
|
|
|
|
|
트랙백 :: http://egoing.net/trackback/376
|
Tracked from 진리의 길 2009/02/19 11:07 x
제목 : [학문] 과학의 정치화(권력화)에 대한 우려_과학에 대한 신학의 조언
근 1세기 사이에 과학 기술은 엄청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우주 정거장'까지 건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과학 기술의 발전이 반드시 인류에게 있어서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과학은 분명 그 자체로서는 '중립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선'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과학의 발달'은 곧 '무기의 발달'을 의미했는데, 우리는 그 무기들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에 대해서 너무나.. |
Tracked from eRin sTyLe 2011/07/16 00:41 x
제목 : 과학, 종교의 또 다른 이름.
“과학이 우리의 삶을 갈수록 편리해지고 윤택해지고 있으며 우리를 안전하게 한다.” 위 명제가 참인가? 꼭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과학 발전은 기술 문명을 낳았고, 그 기술이 사람의 일할 곳을 조금씩 조금씩 빼았고 있다. 과학이 만들어낸 기술에 의해 사람이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 라고 이야기할 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학을 지지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증... |
Tracked from eRin sTyLe 2011/07/16 00:42 x
제목 : 과학, 종교의 또 다른 이름.
“과학이 우리의 삶을 갈수록 편리해지고 윤택해지고 있으며 우리를 안전하게 한다.” 위 명제가 참인가? 꼭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과학 발전은 기술 문명을 낳았고, 그 기술이 사람의 일할 곳을 조금씩 조금씩 빼았고 있다. 과학이 만들어낸 기술에 의해 사람이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 라고 이야기할 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학을 지지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증... |
Tracked from eRin sTyLe 2011/07/16 00:43 x
제목 : 과학, 종교의 또 다른 이름.
“과학이 우리의 삶을 갈수록 편리해지고 윤택해지고 있으며 우리를 안전하게 한다.” 위 명제가 참인가? 꼭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과학 발전은 기술 문명을 낳았고, 그 기술이 사람의 일할 곳을 조금씩 조금씩 빼았고 있다. 과학이 만들어낸 기술에 의해 사람이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 라고 이야기할 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학을 지지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증... |
Tracked from eRin sTyLe 2011/07/19 18:48 x
제목 : 과학, 종교의 또 다른 이름.
“과학이 우리의 삶을 갈수록 편리해지고 윤택해지고 있으며 우리를 안전하게 한다.” 위 명제가 참인가? 꼭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과학 발전은 기술 문명을 낳았고, 그 기술이 사람의 일할 곳을 조금씩 조금씩 빼았고 있다. 과학이 만들어낸 기술에 의해 사람이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 라고 이야기할 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학을 지지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증... |
|
|
|
|
|
공각기동대 - 난민과 반도
|
공각기동대 - 난민과 반도 (TV판 2기 Stand alone complex)
난민과 반도
이 영화속에서 한국은 이렇게 모호한 기호로 존재한다. 4차 핵전쟁 이후의 일본은 핵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난민을 인도적 차원에서 받아들인다. 그러나 난민은 곧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다. 자치구를 원하는 난민과 이를 인정할 수 없는 일본정부의 대립이 이 영화의 주된 갈등구조이다. 이들 난민의 지도자는 쿠제. 쿠제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난민들의 정신적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쿠제와 난민들은 일본 내청의 음모로 인해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 사회의 불안을 증폭시켜 일본을 재무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내청은 난민들이 핵을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조작하고, 그와 동시에 미국과의 더러운 거래를 통해 난민 자치구에 핵을 투하할 계획을 세운다. 소령들은 이 음모를 간파하고, 내청을 숙청한다. 결론은 어정쩡한 해피엔딩이다. 난민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갔을 뿐이고, 일본은 여전히 불확정적인 평화헌법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져 있다.
나는 궁금하다. 도대체 이 복잡한 영화의 시선이 어떤 모습의 일본을 원하는 것인지. '일신독립을 이룩함으로써, 일국독립을 이룩한다.' 첫번째 핵폭에 실패한 미국의 핵잠수함을 강제 해산시키면서 일본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한 말이다. 그는 일본의 만엔짜리 지폐 도안속의 인물이다. 우리로 치면 세종대왕의 서열에 해당된다. 그는 일본의 전면적 개방을 주장했고, 개방만이 서양의 제국주의에서 일본을 지키는 길이라고 강변했다. 그러기 위해서 일본은 철저히 아시아의 촌티를 벗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유명한 탈아론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 분이 후쿠자와 유키치
이 영화의 배경인 4차 핵전쟁에서 미국은 핵을 사용한 나라로, 일본은 방사능을 제거한 나라로 그려진다. 즉 미국은 창이고, 일본은 방패인 것이다. 이 파괴적 행위는 한반도에서 자행되었고, 그 방사능 낙진은 난민과 반도인 것이고. 이 난민을 받아준 유일한 국가는 일본이었다는 이야기. 도덕적 우월함과 그에 걸맞는 수단을 보유한 일본이 여전히 열등한 국가의 처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 영화의 시선은 못마땅해 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궁금한 것이 있다. 왜 이 시선의 프로듀서는 일어나지도 않은 핵전쟁을 만들어 놓고, 그 공간안에서 자신들은 핵을 제거하고, 난민을 받아들이는 선행을 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걸까? 또 이러한 선행이 '일신독립을 이룩함으로써, 일국독립을 이룩한다'라는 비장미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필연일까? 도대체 선행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 보통국가가되야 한다는 것인가?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과거 밖에 없다. 미래에서 확실한 것은 죽음 뿐이지 않은가? 성찰은 과거의 역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상상력 속에서 프로듀싱된 미래는 지멋대로의 결과로 필연되는 위험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한이 반도가되고, 그 땅에 살고 있는 민중이 난민이 된다는 이 얼떨떨한 설정이 겨우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위한 제물이었다면 참 열받는 일아닌가?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는 신사참배의 배후에 마조이즘적 원리가 숨어있다고 진단한 문화심리학자가 생각난다. 그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선조조차 마음대로 추모하지 못하는 희생자라는 피해의식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열광, 하얀빤스와 도덕적 마조히즘 49p) 하지도 않은 선행을 통해서 보통국가화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A급전범과 전쟁의 희생자들을 합사해놓고, 외국에서의 간섭에 불쾌해 하는 일본의 모습 누구와 비교되지 않는가?
 빌리 브란트 영화의 시선이여! 이 사진을 본적이 있는가? 보았다면 아마 괴로우리라. 비내리는 바르샤바 게토 추모비 앞, 전후 처음으로 폴란드를 방문한 서독의 총리가 무릎을 끓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당시 서독인들은 이 사건을 치욕적인 사건이라고 비판했지만, 역사는 가장 자랑스러운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독일과 일본의 차이는 여기에서 온다. 독일은 과거에서 자신을 찾았지만, 일본은 미래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독일은 희틀러의 가학대 음란증(세디즘)과 군중의 피학대 음란증(마조이즘)을 몰아내기 위해 지금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건만, 일본은 이 따위 졸렬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위대한 상상력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개탄스럽다. 이건 정말이지 인류에 대한 죄악이고, 재능에 대한 배..배신이며, 난민과 반도가 된 한국을 두번 죽이는 것이다.
egoing이 남의 나라 예술작품에서 우리나라의 가오가 상했다고 해서 이렇게 발발이 뛰는 것이 아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당신들도 우리만큼이나 모욕을 당했으니까. 오염된 한반도의 핵을 정화하고, 불쌍한 난민을 받아들였으며, 일본인 쿠제를 통해 높은 곳으로 난민을 인도하려했고, 가미가제 정신으로 당신들의 타치코마를 희생시킨 점 백번 양보해서 높이 평가한단 말이다. 그러나 거기까지했어야 했다. '일신독립을 이룩함으로써, 일국독립을 이룩한다'는 그 여자의 비장한 목소리는 하지 말았어야 할 커밍아웃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난민과 반도라는 말이 불쾌한 것이다. 2007/07/04 14:14 |
|
|
|
|
|
트랙백 :: http://egoing.net/trackback/375
|
|
|
|
|
| |
| |
| |
|
|